본문 바로가기

꿈꾸는세상(사진)

호접지몽....ㅋ

호접지몽 [
《장자》〈제물론편()〉 장자가 어느 날 꿈을 꾸었다. 나비가 되어 꽃들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녔다. 그러다가 문득 깨어 보니, 자기는 분명 장주가 되어 있었다. 이는 대체 장주인 자기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를 구분할 수 없었다. 장주와 나비는 분명 별개의 것이건만 그 구별이 애매함은 무엇 때문일까? 이것은 사물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꿈이 현실인지 현실이 꿈인지, 도대체 그 사이에 어떤 구별이 있는 것인가?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피상적인 구별, 차이는 있어도 절대적인 변화는 없다. 장주가 곧 나비이고, 나비가 곧 장주라는 경지, 이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세계이다. 물아의 구별이 없는 만물일체의 절대경지에서 보면 장주도 나비도, 꿈도 현실도 구별이 없다. 다만 보이는 것은 만물의 변화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이처럼 피아()의 구별을 잊는 것, 또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비유해 호접지몽이라 한다. 오늘날에는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해서 쓰이기도 한다.  ‘물아()의 구별을 잊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어 즐기는데, 나비가 장자인지 장자가 나비인지 분간하지 못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호접몽()’이라고도 한다.      [출처] 호접지몽 [胡蝶之夢 ] 네이버지식검색.

      나비의 꿈


   ===  꽃에 앉은 나비와 대화를 하다 ===
 추석 휴일 거닐다가  꽃에 앉아 풍류를 즐기는 나비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내가 다가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장자 제물론에 나오는 호접지몽을 뜨올리고 있었다   위의 내용처럼 장자가 꿈속에 나비가 되어 즐겁게 날아다니다가 깨어보니 장주(장자의 이름)되어 있었다.......
나비와자신의 분간이 힘든 물아일체의 우화를 ........ 인위를 배제한 자연회귀를 설한 장자는 이 우화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현대로 온 장자 : 호접지몽.비몽사몽인가? / 그대 사랑에 취하거든 깨지마라 그대가 그대사랑인지 그대사랑이 그대인지 취하여라 취하여라 사랑에 취하여라
그대 감성에 취하거든 깨지마라 감성이 현실인지 현실이감성인지 깨지마라 깨지마라.  그대 일에 빠지거든 깨지마라 일하는게 기쁨이면 일이 기쁨이고 기쁨이 일이지니
난 나비에게 물었다 그대 삶의 시간은 꽃과 화려함으로 보내는 시간은  너무나 짧고 어둠의 시간은 너무길지 않느냐고 그런데도 현실이 행복하냐고 말을 건넸네
나비는 말을하네  도인을 꿈꾸는이여  그대는 천년을 살아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것이네 왜냐하면 그대(나)는 관념에 가득차 있기 때문이라네
나비(자연)의 세상에 행복이라는 것은 관념을 버리고 현실에 자신이 좋아서 행하는 일에 호접지몽이 되고 물아일체가 될때 행복하느니  그자체가 행복이느니라
나비가되어 꽃과보내는 시간이 짧다고 생각하는 것 너(나)의 시간적 개념에 불과하다네   애벌레의 긴 어둠의 시간을 길다고 보는 것 또한 너(나)의 관념과 세상을 보는
좁은 시간에 불과하다네 ..... 그대(나) 삶에서도 마찬가지라네
어찌하여 삶을 시간의 길고 짧은 개념으로 행. 불행을 말하려고 하는가?
어찌하여 그대(나) 스스로의 삶은 그대 스스로이고 그자체로 인데 세상의 틀에 세인과 비교로 행.불행을 말하고자 함인가?
그기서 그기에 빠지면 인생은 영원히 행복 할수가 없다네 ...영원히 나비도 장자도 볼수 없다네 ㅎㅎㅎㅎㅎ
그것도 모르고 관념의 똥으로 가득 찬 지식의 먹물들은  장자(장주)가 현실과 꿈을 분간못하고  허우적거러느니  깨고나니 인생이 덧없음을 애기하느니 하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들하고 있다고 말이다.
나비가 말을하네 지금 여기있는 내(나비.자연)가 바로 장주(장자.도)이느니라   아직도 그대는(나) 꽃에 있는 나비 밖에 보지 못하는구나 !
장자께서  호접몽의 우화를 설한것은 ....... 석가모니가 팔만사천경을 비유법으로 설하였듯이 나의 이 우화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것이라네
추석 연휴 작은 토굴의 뒤 뜰을 거닐다가 나비와 대화한 한 토막들을 적어 봅니다./